재미와 진실 (1)
재미 삼아 무언가를 읽는다는 말은, 그것이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사람들은 모든 젊은 작가들이 무엇을 쓸지 정하려 할 때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 "재미있는 게 뭐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가장 먼저 던지는 흔한 질문은 아니다.
그리하여 책이 기쁨, 즉 우리가 모든 진정한 예술에 요구하고 기대하는 비할 데 없이 풍부한 경험을 주기 때문에 가르쳐지는 대신, 다른 목적을 위해 가르쳐지는 일이 발생한다.
지난 수년 동안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시는 단지 고등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학년을 통틀어서, 영혼을 즐겁고 활기차게 해줄 수 있는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비타민C처럼 그냥 먹어두면 좋을 것들로 가르쳐져왔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본래부터 재미있지는 않다. 즉 모든 인간들에게 즉각적으로 재미있거나 똑같은 정도로 재미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작가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은 그 어떤 것도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없다.
모든 작가의 각기 다른 편견, 취향, 배경, 경험은 그들이 정말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캐릭터, 사건, 배경의 종류를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반드시 죽을 존재들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고 잃을지도 모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을 위협하는 것들을 싫어하며, 우리의 안전,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들과 무관해 보이는 것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두 명의 작가가 완전히 똑같은 소재에 미학적 흥미를 보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모든 작가는 충분한 테크닉만 있다면 자신들이 특별히 다루는 주제에 대한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모든 소설은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 - 사람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열망과 두려움 - 을 다루니까. 특정한 캐릭터, 사건, 배경 들은 단지 실례, 보편적 주제의 변주에 불과하다.
어떤 두 명의 작가도 완전히 똑같은 소재로부터 미학적 흥미를 느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든 작가가 충분한 테크닉만 있으면 자신들이 특별히 다루는 주제에 대한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면 - 모든 인간은 동일한 근본 경험(매정하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고통받다가 죽는다)을 가지므로, 우리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작가가 할 일은 힘과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캐릭터들의 경험과 우리의 경험의 유사점들을 연결해주는 것 뿐이다 - 작가가 해야할 첫번째 일은, 자연히 우리로 하여금 작가 자신의 캐릭터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생생하게 보고 느끼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그곳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캐릭터들의 세상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작가는 많은 독자가 자신의 캐릭터들의 경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리란 걸 미리 알고서 그 캐릭터들의 세계가 다양한 독자에게도 감각적으로 인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즉 작가는 자신의 캐릭터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독자도 생생히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비록 대리적이긴 하지만, 자신의 캐릭터들이 경험하는 것을 최대한 직접적이고 강렬히 경험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는 어떻게 하면 이것을 가장 잘할 수 있을까?
작가의 스타일이 객관적인 스타일과 주관적인 스타일 사이의 어디에 위치하든, 관습적인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로 독자의 마음속에 작동시킨 가상의 꿈의 선명함과 지속성이다. 작가의 캐릭터들은 우리 앞에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야만 한다. 이 선명함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그들이 행하는 어떤 일도 그 인물이 할 법하지 않은 일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며, 심지어 캐릭터의 행동이 작가 자신에게조차도 놀랍게 여겨질 때도 그러하도록 말이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앞의 작가는 우리가 캐릭터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도, 작가를 따라가는 독자도 캐릭터가 자유롭게 행동할 때 그 캐릭터의 행동을 확신하지 못할것이다.
어떻게 하면 작가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성격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플롯은 캐릭터를 바꿔놓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를 창조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믿는 게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남들에게 드러낸다. 그리고 배경은 캐릭터와 플롯 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천의 어딘가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올리면 시공간의 길이와 너비 전체가 흔들린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모든 요소들은 다른 모든 요소들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캐릭터의 이름을 제인에서 신시아로 바꾸는 것은 소설의 기반을 밑바닥부터 통째로 뒤흔들어놓는 일이다.
따라서 작가의 캐릭터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보고 느끼게 해주려면 - 마치 우리가 캐릭터들이 속한 세상 속 인물인 양 그 속으로 끌어들이려면 - 작가는 단순히 캐릭터들을 창조해낸 다음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을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 - 그들에게 어울릴법한 오토바이와 수염, 꼭 맞는 기억과 은어를 붙여주는 일 - 이상의 작업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팽창하는 창조적 순간 속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캐릭터, 플롯, 배경들을 동시에 그려내야만 한다. 그는 도공이 항아리를 만들듯 자신의 전체 세계를 하나의 일관성 있는 손동작으로 만들어내야만 한다. 혹은 콜리지가 말했듯, **그는 자신의 유한한 마음으로 무한한 "나 자신 I AM"의 작용을 모방해야만 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진실이나 사건들의 경위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 또는 '예술가의 초상' 혹은 어쩌면 흥미로운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서, 우리의 연구와 흥미의 대상이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위대한 문학을 읽으며 느끼는 흥미 중 가장 커다란 부분은 바로 '뭔가를 알아냈다는 Onto something' 느낌이다. 그리고 삶의 비전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책들을 읽을 때 지루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작가가 그것들을 한꺼번에 다 하기도 하고 그러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한번에 몇 가지 생각밖에는 떠올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작업해 나가는 과정은 결국 그를 자신의 목표로 이끈다. 어찌된 셈인지 현대 작가들조차도 자신들의 작품이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나 영적인 힘에 의해 쓰였으며, 그 글을 나중에 다시 읽을 때면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걸 자각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내가 소설의 요소들이라고 할 때, 그건 스토리를 쌓아나가는 데 필요한 모든 개별적인 요소들(Discrete particles) 하나의 이야기에서 떼어내 다른 이야기에 넣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하더라도 훼손되지 않는 요소들을 의미한다. 각 요소들은 떨어져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의미를 지니지만, 나란히 놓였을 때는 일종의 추상 개념들 - 한 차원 높은 시적 사고의 구성단위들 - 을 형성함으로써 보다 중요한 것이 된다.
작가들이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조합이다. 새로운 조합을 찾는 일은 소설의 절차의 인도를 받는 동시에, 소설의 절차와 일체를 이룬다.
모든 훌륭한 예술의 기본적인 특징은 목적과 수단, 또는 형식과 기능의 조화에 있다. 적어도 형식의 문제만을 놓고 봤을 때, 내러티브의 필수조건 (sine qua non)은 시간이다. 우리는 소설 전체를 단 한순간에 읽을 수 없다. 따라서 정합성을 갖추려면, 단지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통일된 경험으로서 작용하려면 내러티브는 전개에 어떤 지속적 흐름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첫 페이지는, 비록 서술로만 이루어진 페이지라 할지라도 질문과 의혹, 그리고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궁금해하며 다음 페이지들로 계속해서 내달린다. 우리를 문단에서 문단으로, 장에서 장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이 내던짐(casting)이다. 적어도 관습적인 소설에 있어서, 우리가 이야기가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을 꺼버리는 순간 작가는 실패한 것이고, 우리는 책 읽기를 관둔다.
소설이 짧으면 짧을수록 플롯이 지속적 흐름을 지녀야 할 필요성은 줄어든다. 서너페이지의 이야기는 거의 어떤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더라도 여전히 재미있을 수 있다.
몇 페이지 이상의 어떤 내러티브든지 간에, 만일 플롯에서의 기대감을 유발한 다음 그것을 만족시켜주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플롯짜기가 작가의 최우선적이고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모든 좋은 작가의 계획의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플롯이다.
작가는 다음의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로 플롯을 짠다. 첫째, 어떤 전통적 플롯을 차용하거나 실생활에서의 사건을 차용함으로써. 둘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부터 거슬러올라감으로써. 셋째, 최초의 상황에서부터 앞을 향해 더듬어나감으로써.
일반적으로 작가는 플롯을 한 번에 다 짜지 않고 그에 대해 오래도록 숙고한다. 마음속으로 여러 대안을 시험해보고, 메모를 하고, 책을 읽거나 빨래를 하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이디어를 품고 있으면서 플롯을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동안 고치고 또 고치는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 책을 읽다가 마주치는 흥미로운 사실, 대화의 일부분, 신문에서 읽은 무엇, 집주인과의 싸움 - 플롯의 구성을 위한 잠재적인 재료, 혹은 캐릭터나 배경, 주제 - 이것들 또한 플롯에 영향을 미치므로 - 를 위한 잠재적인 재료가 될 수 있다.
전통적인 이야기나 삶에서 가져온 어떤 사건으로 작품을 시작하는 작가는 이미 작품의 일부를 완성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으며, 보통은 그 이유 또한 알고 있다. 그에게 남겨진 주된 작업은 자신이 그 이야기에서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를 알아내는 것과 그것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그리고 왜 그 이야기가 그의 흥미를 끄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효율적이고 우아한 작가는 각각의 장면이 소란스럽고 복잡한 것들 없이 최대한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하며, 한 장면에서 다른 한 장면으로 최대한 매끄럽고 신속하게 이동한다.
장면의 리듬 - 템포나 속도-을 관찰하는 것 외에도, 작가는 장면을 구상할 때 강조 emphasis와 작용 function - 그것들의 요소들과 관련하여 - 의 관계에 철저한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서 강조란 어떤 특정한 디테일에 들이는 시간의 양을 의미하고, 작용이란 장면과 스토리 전체에서 그 디테일에 의해 수행되는 작업을 의미한다.
작가가 사건의 시퀀스를 구상하면서 의식적으로든 직관적으로든 염두에 두고 있는 이 모든 고려 사항들은 클라이맥스로 이어진다.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구상해내기 위해서, 작가는 클라이맥스를 위해 논리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분석해내야 한다.
또한 이야기의 구상이 먹혀들려면 클라이맥스를 정당하게 만드는 문제에 대한 작가의 해결책이 믿을 만하고도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플롯을 생각할 때, 작가는 캐릭터와 그에 따른 효과들까지도 생각해야만 한다. 동시에 그는 왜 그 이야기가 자신의 흥미를 끄는지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한 시간 내에 생각해낼 수 있는 플롯이 서른 개가 된다 할지라도 그의 관심을 꼭 붙들어 그로 하여금 실제로 이야기를 쓰게 만들 플롯은 겨우 하나뿐일 것이다. 작가가 그 클라이맥스적 사건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 안의 무언가를,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뜻이다.
우선 소설을 계획한 후 그것을 쓰는 전체 과정 - 캐릭터들과 배경의 디테일에 공을 들이고, 소설의 정서에 어울릴 법한 스타일을 찾아내고, 예상치 못했던 플롯상의 요구 조건들을 발견해내는 것-을 통해 작가는 처음에 시작한 이야기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전달한. 그는 자신의 첫번째 임무가 내가 앞에서 이야기의 일차적 primary 의미라고 불렀던 것을 정당하게 만드는 것임을 안다. 하지만 모든 결정적인 느낌들이 그러하듯, 보다 큰 이차적 secondary 의미, 즉 단지 한 인간의 감정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가치에 대한 긍정과 인정을 나타낸다. 우리가 예술 작품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보통 이처럼 더 큰 이차적 의미에서이다.
모든 위대한 소설의 일차적 감정 (책을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 또는 캐릭터의 감정, 또는 이 둘의 어떤 조합)은 머잖아 개별적인 의미를 여의고 인간의 삶에서 보편적으로 좋은 것 - 인간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 - 의 표현, 즉 가치에 대한 진술로 전환된다. 좋은 소설에서 이 보편적 진술은 너무 미묘하거나, 너무 제한적이거나, 스토리라는 방식을 제외한 어떤 방식을 통해 표현되거나 할 가능성이 크다. 즉 그것을 어떤 행동 법칙이나 일반 이론으로 변형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도 매우 정확히 이해하지만, 가장 날카로운 문학 평론가조차도 그것을 말로써 공식화하거나 나아가 우리에게 스토리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데는 애를 먹을 것이다. 소설의 '철학'이 '구체적인 철학'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아마도 여기서는 유추 analogy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최상의 소설 또한 신뢰할 수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규범들을 제공한다. (제인 오스틴의 장편소설에서) 처음 만나는 에마보다는 변화된 에마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없이 배우면서 선의 비유를 받아들인다. 이런 미묘한, 대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은 위대한 소설이 찾아내고자 하는 '진리'다.
자신의 클라이맥스를 의미 있고 설득력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극적인 장면을 보여줘야 하는지를 분석한 후, 작가는 소설의 요소들 - 각 요소 모두 의미의 책임을 지고 있는 - 을 도입한다. 여느 훌륭한 거짓말쟁이들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일들에 대해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설득력있는 해결책을 만들어낸다.
만일 주요 캐릭터가 자신만의 목표를 위해 투장해는 행위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의지에 지배 당하는 피해자라면 어떤 소설도 진정한 재미를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주요 캐릭터가 단지 다른 이들 때문에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스스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건 소설 초보자들 모두가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다.)
우리는 일이 어떻게 풀려갈지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건 바로 캐릭터 자신이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흥미는 감정이입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캐릭터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캐릭터는 알지 못하는 위험을 예측하긴 하지만, 우리는 캐릭터의 욕망을 이해하고 어느정도까지는 그에 공감하면서 캐릭터가 찬동하는 것에 대해 똑같이 찬동한다. 그 캐릭터의 이상이 비현실적이거나 불충분한 것으로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녀의 동기가 지닌 함의들이 무엇인지 - 이를테면 어쩌다 자립에 대한 그녀의 욕망이 상충되는 공동체적 가치들의 십자포화에 휩싸여버렸는지-를 오직 깨닫음의 순간, 즉 클라이맥스에 가서만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르게 되기 훨씬 이전에, 작가는 우리에게 그녀의 강력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단순히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보여주어야만 한다.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건을 통해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반드시 플롯에 나타나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헬레나의 동기가 완전히 설득력을 지니려면 우리는 그것의 기원들을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또한 플롯에 등장해야 한다. 작가는 이 모든 사건들, 이야기의 모든 중요한 요소들의 설득력 있는 증거들을 매끄럽게 진행시키며 필연적 플롯으로 잘 엮어내야만 한다.
“위대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어떤 고정된 법칙도, 한계도, 제약도 있을 수 없다.” 존 가드너는 소설가로 유명했던 것만큼이나 문예창작론 강사로도 유명했다. 자신이 했던 수업과 세미나에 기초한 이 실용적이고 유익한 안내서에서 그는 훌륭한 글의 원리와 테크닉을 간단하고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소설의 기술』에서 쓴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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