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은 천천히, 조용히 온다
영감은 매우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온다. 당신은 타자기나 종이 앞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며, 한두 시간쯤 아무 생각 없이 머리카락만 쓸어 넘길 것이다. 전혀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좋은 일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다만 당신은 줄곧 타자기 앞에 앉아 있어야 하며 공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조만간 무언가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기만 하면 된다. 또한 당신은 내일도 잠깐 틈을 낼 것이고, 또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영원히 언제나 그렇게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버나드 쇼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언제나 십여 명의 장관과 부관들에게 이미 결정된 내용을 큰소리로 외쳐댔다는 풍문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는 여러 달 동안 뭉그적거렸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똑똑하고 열정적이며 지체하지 않고 추진력 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나는 창조적이지 않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창조적이지만, 꽤 긴 시간 게으르고 빈둥대고 혼자 있어야만 한다. 마치 강둑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처럼 나태하게, 고요히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며, 늘 의지적이지는 않게 지내야 한다. 이 조용한 관망과 사고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생각 속에 머물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의지적이라는 것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 즉 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그 무엇을 행한다는 뜻일 뿐이다. 거기에 새로운 상상적 이해는 단 한 톨도 들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곧 그 영혼은 몹시 황폐해지고 메말라 버린다. 왜냐하면 재빨리 서두르면서 효율적으로 하나의 일에 이어 다음 일을 해치우는 탓에, 자신의 생각이 찾아들어 무르익고 고요히 빛날 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의지적으로 작정하고 덤빌 때, 실은 그 일을 하지 못하리라는 상상의 공포를 드러내는 것이다. 당신이 그 일을 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당신은 행복한 미소를 띠고서 유유히 착수할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블레이크, 톨스토이 같은 예술가들은 이기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어떤 종류의 안전도 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런 생각이 그들에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너의 걱정이 그의 키를 한 치라도 늘릴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은 감히 게으를 수 있다. 늘 아무런 압박감도 느끼지 않고 의무에 쫓기지도 않는다. 나쁜 처지에서도 감히 사람들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대하고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최선은 스스로의 자유라는 것, 그래야만 상상력이 자기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 설령 그 방식이 당신, 나 혹은 정치가나 독실한 기독교인에게 끔찍하게 나빠 보이더라도 말이다.
이런 바보들, 의지 경배자들은 격언과 잡다한 일상사의 목록과 십계명에 따라 살아간다. 훌륭하고 위대한 격언 하나가 내면에서 작고 조용한 계시의 폭탄을 터뜨리는 그런 창조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단지 기계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적극적이고 의지적이며 당장의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은 이 계명을 매일 생각하고 기록하고 이를 악물고 실행하면서, 자신이 부모를 진정 공경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의 부모도 이를 알고 있고 느낄 수 있다. 외면적 행위는 아무것도 은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빈둥거리는 창조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건 창 흥미로운 말이군. 나는 내 부모를 별로 공경하지 않는 것 같아. 왜 그런지 생각 좀 해 봐야겠어. 그의 상상력은 창조적으로 계속 방황하다가 마침내 그에게 어쩌면 아버지는 까다롭고 편협한 사람이며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쟁쟁거리는 잔소리꾼이라는 진실에 직면하게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우울해지고 당황하여 이 문제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계속 생각에 몰두하며, 자신의 상상력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려 볼 것이다. 예컨대 자신이 좀 더 친절해져야 하며 화를 억눌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등을 상상한다. 그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까다롭고 편협한 사람이 과연 그들일까, 오히려 내가 속 좁은 인간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는 줄기차게 상상력을 작동시켜서 그 답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처럼 상상력은 뭉그적거리기 - 오랜, 비효율적인 행복한 게으르기, 빈둥거리기, 시간 낭비하기를 필요로 한다. 늘 뭔가를 부산스럽게 하는, 종종걸음 치는 생쥐마냥 바쁜 사람들은 하찮고 치밀하고 단속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고기 값에서 연간 3달러 47센트를 절약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를 난 알고 있지'와 같은 생각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느린, 커다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위안을 주고 고상하고 빛나고 자유롭고 유쾌하고 커다란 생각이 적게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그들은 더욱 조바심이 나서 필사적으로 사무실에서 사무실로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오로지 행동을 통해서 삶이 결국 따뜻해지고 의미 있어질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들은 영혼이 약해서 자신을 명상 상태로 끌어올릴 수 없는 탓에 영적 현실을 볼 수도, 그 현실로 자신을 채울 수도 없지만, 그것을 보기를 갈망하며 자신의 영적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서 더욱 행동에 박차를 가한다. _ 철학자 플로티누스
당신이 글쓰기를 시작한다면, 훌륭한 생각들이 샘솟아 나오고 그리하여 무언가 쓸거리가 생겨날 것이다. 좋은 생각이 당장 혹은 한동안 떠오르지 않더라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생각들을 기다리면 된다. 아무리 하찮더라도 사소한 생각들을 적어두기만 하라. 그러나 더 이상 자신의 게으름이나 고독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혹시 당신의 게으름이 완전한 슬럼프 혹은 우유부단함이나 초조나 걱정 혹은 과식으로 인한 신체적 나른함이라면 그것은 나쁘고 끔찍하고 철저히 비생산적이다. 만일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창조적인 게으름과 대체해 버리는 나태함이라면, 예를 들어 탐정소설이나 신문 같은 온갖 종류의 인쇄된 허튼소리로 자신의 정신을 채우는 우아한 게으름이라면, 이런 게으름 역시 나쁘고 완전히 비창조적이다. (아주 작은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읽기가 이런 게으름에 속한다. 그저 시간을 때우려는 읽기 말이다.)
당신이 홀로 긴 산책을 하거나, 옷을 만들며 한참 동안 꿈꾸며 보내거나, 밤에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들을 곱씹거나, 정원의 땅을 일구거나, 혼자 장시간 운전을 하거나, 혼자 그림을 그리며 부리는 게으름이라면 혹은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처럼 연필을 들고 종이나 타자기 앞에 앉아 생각나는 것들을 조용히 써내려 가는 그런 게으름이라면, 그것은 분명 창조적인 게으름이다. 바로 이런 시간에 당신은 따스한 상상과 멋지고 생생한 생각들로 서서히 채워지고 재충전된다.
각자 자기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훌륭한 생각이 천천히 나타난다는 것을 톨스토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좋은 착상을 짜내려고 서두르는 것은 나쁜 계획이다.
오늘 당신이 쓰고 있는 것은 지난 어느 날 게으름을 피운 시간 동안 생각하고 창조해 낸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은 생각과 상상을 천천히 쌓아올린다. 그래야만 훗날 당신이 펜을 들면, 생일 파티에서 환호성을 질러대는 아이들처럼 피상적이거나 기계적이 아닌 진정한 이야깃거리가 있게 된다. 그 이야기는 진실한 것이고, 오랫동안 내적으로 검토되어 온 것이며, 무엇엔가 확고히 기반을 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진실함이란 "콜럼버스는 1492년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는 식의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이론적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진정한 자아로부터 나와야 하며, 또한 사람들을 감동시키려는 당신의 희망으로부터가 아니라 진심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믿는 것들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당신이 지속적으로 매일 일정 시간 동안 타자기 앞에 앉아 있기를 바란다. 비록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애꿎은 머리카락만 쓸어 넘길지라도. 하루나 이틀 건너뛰면 다시 시작하기 어렵다. 또 다시 아무것도 종이 위에 쓰지 못하는 공허한 빈둥거림의 한두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지내기란 늘 쉽지 않다. 특히 성취 강박증을 지니고 늘 바쁘게 효율을 따지며 사는 족속들이라면 이런 시간에 불안과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1938년 최초 출간된 글쓰기책으로서 1987년 재출간된 이래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된 후 박물관 서점에서 계속 팔려나가며 ‘창조적 영감’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아티스트에게 고전이 된 『글을 쓰고 싶다면』은, 2008년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으로 국내 번역소개된 후 절판되었다가 2016년 ‘글쓰기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출판문화공간에서 『글을 쓰고 싶다면(If you want to write)』이라는 원서의 이름으로 새롭게 선보인다
『글을 쓰고 싶다면』에서 쓴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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